
오랫동안 문화생활을 사치라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우리 집에서 문화생활이란 말은 거의 쓰이지 않았습니다.
영화관에 가는 날이 1년에 몇 번 있었을 뿐,
미술관이나 연극, 뮤지컬은 이름만 들어도 저와는 상관없는 세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세계는 늘 '여유 있는 사람들'의 것이었고, 나는 그 바깥에 서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문화생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필요하지 않으니 궁금하지도 않았고, 궁금하지 않으니 더 멀어졌습니다.
그렇게 저는 문화와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왔습니다.
어릴 적 저는 의외로 소심한 아이였습니다.
발표를 해야 할 때,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때면 몸이 작아졌습니다.
내 말이 바보같이 들리지는 않을지, 내 취향이 우습지는 않을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저는 늘 누군가의 속마음을 대신 상상하며 저 자신을 먼저 검열했습니다.
가난했고, 집 안에는 잦은 불화가 있었습니다.
어디에도 기대 설 수 없는 느낌, 외줄타기를 하는 느낌.
그 감정은 자존감을 키우기에는 너무 척박한 토양이었습니다.
그렇게 10대를 지나왔습니다.
그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공간에 들어갈 때면 늘 먼저 두려워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온 티가 너무 나면 어쩌지, 이 세계의 규칙을 몰라서 웃음거리가 되면 어쩌지.
그런 생각들이 저를 망설이게 했습니다.
알려줄 사람도 없으니, 저는 종종 그 두려움을 '관심 없음'이라는 말로 포장해 왔습니다.
어쩌면 문화생활과의 거리감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작년에 문화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삶의 만족도가 높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정말 그럴까? 어떤 만족감을 줄까? 얼만큼 풍요로운 감정일까?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사람들로 향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문화생활을 자주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결이 있었습니다.
삶을 급하게 끌고 가지 않는 태도, 스스로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 여유 같은 것.
그 중 한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그 친구는 늘 유유히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속도, 단정한 말투, 자기 자신을 과장하지 않는 태도.
어느 날 저는 그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자주 문화생활을 하느냐고.
친구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전시와 공연을 자연스럽게 다녔다고 말했습니다.
특별한 결심이 아니라, 문화생활이 익숙한 환경에서 자란 결과였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럼 내가 느끼는 이 두려움과 무관심은 정당한가에 대해 질문들 던졌고,
34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쉬운 답이 나왔습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을 단단히 지켜낸 사람들이 수 없이 많이 있다는 걸.
그리고 멋져 보이는 것이 정답은 아니라는 걸.
자존감은 누군가가 대신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도.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지난 삶이 부끄러웠을뿐.
그런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을 뿐.
나의 인생은 이미 채워진 그릇이 아니라, 아직 비어 있는 상자입니다.
그리고 그 상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담아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반짝이는 것들로 가득 찬 상자를 태어날 때부터 받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를 아껴주겠지만,
이번 생의 내게 주어진 임무는 내게 주어진 나만의 상자에 차곡차곡 하나씩 담아내는 것.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된 순간, 빈 상자는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다면 한 마리 까마귀처럼 여기저기 세상을 날아다니며 반짝이는 것들을 모아보자.
미술 전시회는 그 상자를 처음으로 정확하게 마주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미술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괜히 마음이 오래 머무는 그림이 있었고, 몇 번을 봐도 불편한 작품도 있었습니다.
이유는 몰랐지만, 분명한 감정은 남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그 감정들을 글로 풀어냅니다.
작품에 대해 찾아보며 의미를 읽어보고, 그 의미와 나의 감정이 만나는 지점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그러다 보면 내 마음에도 이름이 붙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런 것에 끌리는 사람이구나. 이런 분위기에서는 불편해지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나는 조금씩 나를 알아갑니다.
아직 '취향'이라는 말은 조심스럽지만, 분명 나라는 윤곽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문화생활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를 들여다보는 하나의 방식이었습니다.
책이 저자가 만들어둔 길을 따라 걷는 산책이라면,
미술 전시는 불이 켜져 있는지조차 모르는 방의 문을 여는 일에 가까웠습니다.
안을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가구에 앉아보고, 취향이 아닌 물건은 조용히 지나칩니다.
볕이 잘 드는 창 앞에서 잠시 머물다 나만의 온도를 남겨둔 채 문을 닫고 나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빈 상자를 갖고 태어납니다.
그 상자를 채우는 방식은 저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관계로, 어떤 이는 성취로, 또 어떤 이는 고요함으로 채웁니다.
저는 그 방법 중 하나로 문화생활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아직 문화생활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채워준다는 감각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화생활이 두렵게 느껴지는 누군가에게, 거창하지 않게 전시회 하나부터 시작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곳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생각보다 친절하며, 무엇보다 괜찮은 나를 만나게 되는 공간이니까요.
빈 상자는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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